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앙투아네트 (문단 편집) === 성격 === 근래까지는 혁명이 정당화되려면 왕실이 악의 축이 되어야 했기에 남편과 도매금으로 묶여 사악하고 사치스러운 이미지로 알려져있었으나, 실제로는 '''프랑스 왕비치고는 오히려 매우 검소한 편이었으며 선량하고 동정심 많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사치스러운 궁정에 비해 오스트리아 궁정의 검소하고 소박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교적이었고 만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근사근했으며,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편견없이 사람을 대했다. [[루이 16세]]가 사냥 중에 농민을 다치게 하자, 직접 달려가서 간호해주고 모든 손해를 물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평생 소식을 했기 때문에 뚱뚱한 다른 왕족과 달리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졌다.[* 결혼 전까지는 분명 그랬지만 출산 후 초상화들에서는 21세기 기준으로 꽤나 살집이 있는 편이다.] 식사 시간에 [[루이 16세]]가 음식을 깨끗하게 비우는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고 한다. 자유롭고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느슨하게 자란 앙투아네트는 [[루이 14세]] 때부터 형성된 프랑스 궁정의 시시콜콜한 격식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공식 행사에서만 굉장한 에티켓을 요구했고 할 일만 잘 하면 나머지 시간은 마음대로였는데 프랑스에서 왕족의 생활은 하루종일 구경거리였다. 아침마다 왕비가 옷을 입을 때만 최소 4명의 수행원이 필요한데, 담 다투르가 치마를 보여주고 [[드레스]]를 보여주면 담 도뇌르가 속옷을 골라준다. 담 도뇌르보다 서열 높은 귀족이 들어오면 그가 속옷을 골라준다 등등 온갖 까다로운 절차가 있었다. 이 때문에 왕비는 30분이 넘도록 추위에 떨며 수행원들이 옷을 입혀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에 [[부르주아]] 출신인 의상 전문 [[디자이너]] [[로즈 베르탱]]을 고용해 아침마다 카비네에 불러들여 둘이서만 옷을 골라 입었다. 이 때문에 20명이 넘는 왕비의 수행원들이 잘려버린다. 거기다 우아함으로 대표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취향은 기존 프랑스 궁정환경과는 잘 맞지 않았다. 당대의 프랑스 궁정은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한 뒤에 누가 더 [[사치]]스러운지 겨루기 식으로 대단한 사치를 부렸고 왕실 식구들의 일과는 전부 공적 영역이라 귀족뿐 아니라 일반 백성까지 왕의 저녁식사를 구경하면서 [[신격화|하늘처럼 우러러 보았다]]. 하지만 호기심 어린 수백 명 앞에서 일거수일투족이 구경거리가 되는 삶은 왕족에게도 고된 일이라, [[루이 15세]]의 딸들도 이런 자리에는 꼭 참석했지만 불편해서 거의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티 트리아농 궁을 요양처로 받은 뒤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주로 이곳에 머물며 베르사유 궁정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역대 프랑스 왕비 중 자신만의 거처를 받은 왕비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일했는데, 그녀는 프티 트리아농 궁을 자기 취향으로 꾸몄다. 사치스럽지는 않았지만 전원생활에 환상이 있던 왕비는 [[오리]], [[닭]], [[소]]를 키우고 세브르산 고급 [[도자기]]에다 [[우유]]를 짜기도 하였다. 왕비는 목가적이고 여유로운 삶을 꿈꾸며 [[도교]]와 비슷한 삶을 살았지만, 이게 대중들에게는 오히려 미운 털 박힐 만한 것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관련된 악의적인 소문이 떠돌던 당대 생각과는 달리, 프티 트리아농은 방이 8개 정도 되는 건물로, 현대 기준으로도 부잣집 [[별장]] 정도의 크기다. 프티 트리아농 궁의 내부도 섬세한 장식과 전원풍의 우아함을 간직한 형태이며 사치스럽기보다는 편안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프티 트리아농은 증축 공사도 없었고 [[뒤바리 부인|바리 백작부인]]이 남긴 가구를 [[중고|받아 쓰는 등]] 쓸데없이 건물에 돈을 쓰지도 않았다. 실내장식에 거금을 들였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실제로는 건설 비용이 20만 리브르로 당대 왕실에서 건물 하나 개조하는 데 사용한 돈의 일부밖에 안 썼다.[* 물론 당시 2개의 후작가로부터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아 프랑스에서 한 손에 꼽히는 부자가 됐던 [[라파예트]] 후작의 뒤모티에 가문의 연수입이 23만 리브르였다는 걸 생각하면, 적은 돈은 아니긴 하다. 현 가치로 환산하면 프티 트리아농의 리모델링 비용이 대략 285억이다. 참고로 트리아농은 [[트리아농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유했던 [[성 이슈트반 왕관령|헝가리 왕국]]이 멸망한 곳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프티 트리아농에 틀어박혀 살아가는 왕비를 비난했는데, 그곳에서 친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연회를 열고 살아가는 왕비의 모습은 "로트리시엔(오스트리아 년), 외국인이어서 저런다!"는 비난과 함께 이런저런 오해를 살 만한 것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티 트리아농에 [[정원]], [[동굴]], 작은 [[폭포]], 사랑의 신전 등을 꾸미고 목가적인 삶을 즐겼는데, 이건 안 그래도 보는 눈 많은 왕실에서 '일국의 [[왕비]]가 왕비로서 규정된 의무를 방임한 채, 그저 소수의 친한 측근들과 숨어서 놀기만 하는 게으름'으로 비춰져 입방아에 올랐다. 한발 더 나아가 프티 트리아농에 입회하지 못하는 다른 많은 귀족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낌으로써 왕비가 자기와 친밀한 몇몇을 챙겨서 권력과 이권을 나눠먹는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왕비란 항상 귀족 사교계 중심에 서서 사교계 전체를 두루두루 살피고 균형을 조율해야 하는 위치인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수의 측근을 데리고 그 중심에서 도피해버렸으니 이런 불만이 터져나오는 건 당연했다. 왕비의 이런 태도는 다수의 귀족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으로 보여 왕실에 대한 지지기반을 점차 흔들리게 만들었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인위적인 이상향에 빠져들게 됨으로써 정작 중요한 바깥 민중들의 삶을 보지 못하게 되어 프랑스 전체에 심상찮은 분위기가 돌고 있음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마리 앙투아네트 본인이야 단지 나이가 들수록 허례허식 심한 베르사유 본궁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에 지쳐서 조용한 프티 트리아농 궁에서 휴식하며 살고자 그런 것뿐이었겠지만, 이 행동의 결과는 최악의 형태로 나타나고야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